<귀주대첩 민족기록화>
1010년(현종 원년), 요나라 성종은 강조가 목종을 강제 퇴위 시키고 대령군(현종)을 왕으로 추대한것을 구실로 직접 기,보병 40만명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구실이였을뿐. 실제 고려를 침략하여 거란의 땅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성종은 자신의 군대를 "의군천병(義軍天兵)"이라 칭하고 압록강을 건너 흥화진(평북 의주군 위원면)를 직접 공격했다.
그러나, 흥화진을 지키던 장수는 불세출의 명장, 서북변 도순검사 양규였다.
양규의 지휘로 요나라의 공격이 수차례 실패로 돌아가자 성종은 여러번 항복권고를 하였으나 이마저도 무시하였다. 이때 북계(평안도일대)의 최고권력가인 강조가 이현운과 함께 30만 대군과 검차(劍車)란 신무기를 들고 통주(평북 선천)근처에서 진을 쳤다. 이에 성종은 전군의 반을 남기고 강조가 있는 통주로 진격했다. 초반 강조는 검차를 이용하여 요나라 기병대를 대파했지만 점점 자만심에 빠져 전쟁중에 바둑을 두는등 장수로써의 위엄을 잃어갔다. 이에 성종은 고려군의 우측을 공격하여 고려군을 무너트리고 본진까지 격파하여 강조를 사로잡았다. 몇번이고 귀순을 권했지만 결국 강조는 고려의 무장답게 지조있는 최후를 맞이했다.
강조의 군대가 대패하자, 사기를 잃은 고려군은 계속 성안에 숨어 방어에만 치중했다. 이때 흥화진의 양규는 방어선을 보수하고 인근 고을을 수복한 후, 자신휘하에 있는 병사중 정예기병(자식이 없는) 700명을 차출한다. 역사에 길이 남을 "700"의 탄생이었다.
12월, 양규는 700기병대를 이끌고 통주로 가서 흩어졌던 고려군 1000여명을 모아 재정비했다. 곧바로 곽주(평북 곽산)에 주둔한 요나라 군대 6000여명을 몰살시키고 백성 7000여명을 구출해 통주로 옮겼다. 이날 성종은 여세를 몰아 서경(평양)을 공략하려 했으나 실패하여 개경으로 군을 돌렸다. 현종은 강감찬의 건의로 나주로 피난을 갔고 서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했다. 성종 또한 후방을 위협받고 있었고 청야전술로 병참이 끊겨 위태로웠기에 화친을 받아들이고 후퇴를 단행했다. 후퇴중 서경의 탁사정이 요나라 기병대 1000여명을 물리쳤으며 이에 함락되지 않은 성들이 즉시 반격에 나섰다.
1011년 1월 18일, 양규는 군대를 이끌고 무로대(의주 남쪽)를 급습하여 요군 2000여명의 목을 베고 백성 3000여명을 구출했다.
19일에는 이수(귀주 남방 50리, 통주 북방 30리)를 공격했는데 거란군이 도망가자 석령까지 추격해 2500여명의 목을 베고 백성 1000여명을 구했다.
22일에는 여리참(의주 지방)을 요군 1000여명을 물리치고 백성 1000여명을 구출했다.
이같이 양규는 기병을 이용한 속도전으로 요나라군을 공략하였고 백성들을 무사히 구출할수 있었다.
이를 볼때 뛰어난 기병전법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아가 기마술의 달인이었으리라 사료된다.
28일, 구주에서 거란군 1만을 물리친 귀주별장 김숙흥이 양규와 합세했다. 퇴각하는 요나라군을 치기 위해서였다. 양규는 애전(艾田)을 지나던 요나라 선봉 1000여명을 물리쳤다. 그러나 잠시뒤 성종이 이끄는 요나라 본대가 고려군을 불시에 공격했다. 고려군은 하루가 지나도록 용감히 싸웠으나 압도적인 숫자와 누적된 피로, 부족한 병기로 인해 군대는 전멸하였고 양규와 김숙흥은 적진으로 돌격해 들어가던중 수백개의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당시 요나라 본진은 2만. 양규는 6번의 전투로 인해 군사가 1000여명이 되지 않았고 김숙흥 또한 2000여명이 넘지 못했다. 요군도 이전투로 큰 타격을 입어 두 맹장들의 위력이 대단했다 할수있다. 양규는 요군과 싸우면서 포로는 물론 말,낙타,무기등 수도없이 많은 전리품을 얻었다.
종전후, 현종은 양규의 공을 치하하여 공부상서를, 김숙흥은 장군 직위를 내렸다. 4월, 양규의 아내 은율군군(殷栗郡君) 홍씨(洪氏)에게 평생 곡식 1백섬을 주고 아들 대춘(帶春)을 교서랑(校書郞)에 임명하였다. 현종 15년에는 삼한후벽상공신에 책봉되었다.
양규의 군사수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1500여명이란 말도 있고 3000여명, 5000여명까지 갔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양규는 숫자에 개의치 않았다. 양규는 자신이 직접 뽑은 700기병대를 중심으로 거란군을 분산시켰고 또한 움직이지 못하도록 고착견제하였다. 덕분에 양규는 빠른시간내에 그의 기병대로 거란군을 물리치고 백성들을 구출할수 있었다. 평야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 요나라 기병대도 고려 기병대에겐 힘을 쓰지 못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자신감을 얻은 고려는 8년뒤 3차 침입에서도 강감찬의 승리로 요나라를 물리칠수 있었다.
양규의 공도 크지만 그를 따라 목숨을 걸고 싸워준 700기병대야 말로 모두 충의지사이며 맹장들이었다.
뒤늦게 후세에 들어 그들의 공을 인정받았지만 그들의 투지와 충혼은 영원토록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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