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무기중 특히나 대도류 병장기는 그 신비감과 상상력을 자아내기 좋은 무기이다. 그중 가장 최고라 일컬러지는 무기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이다. 달이 누운 듯한 모습을 한 이 무기는 큰 칼에 긴 자루를 붙힌것이다. 그래서 창(槍)이 아니라 도(刀)에 속한다. 대도(大刀), 월도(月刀), 언월도(偃月刀), 청룡도(靑龍刀)등으로 불리워지며 칼과 자루가 이어지는 부분에 용머리로 장식되어 있다. 칼등에는 곁가지가 있으며 그 가지엔 수술같은 장식을 한다. 우리나라에는 임진왜란때 명군에 의해 전파된다.
흔히 우리가 청룡언월도 하면 관우를 떠올리는데 실제 삼국지의 배경인 후한시대에는 대도류병장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청룡언월도는 송나라때부터 만들어진 무기이며 주로 말과 사람을 함께베는 참마(斬馬)의 용도로서 먼저 사용되었다.그렇다면 왜 관우는 청룡언월도를 들고 있는 것일까? 당시 동아시아에는 한나라때와 달리 중장갑옷들이 대거등장하던 시대였기때문에 더 무겁고 위력적인 무기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때문에 청룡언월도같은 대도류 병장기가 대거 등장하게 된다. 이에 그시대의 소설가 나관중은 <삼국지연의>를 쓸때 관우의 무용과 의기를 표현하기위해 송나라의 무기를 한나라에서 사용하게끔 소설을 썼다. 이런 삼국지가 대히트를 치자 청룡언월도의 기법도 관우가 만든것이라 전하면서 36도법(刀法)을 만든다. 그러나 이 모두는 전해지지 않는다.청룡언월도는 위력면에서는 뛰어나나 쉽게 다룰수 없는 무기였기에 일부 무장들이 전시에서 사용하는 것 외엔 의장용으로 퇴색되었다.
명나라의 병법가인 모원의도 "언월도는 기예의 웅장함을 보여줄뿐 진중에선 사용할수 없다."라고 할정도로 실제 전장에서 사용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사정이 달랐다.
무예도보통지에 이르길, 우리나라의 청룡언월도는 중국에 비해 장식이나 크기면에서 빈약하지만 서슬이 퍼렇고 위협적이며 가볍기 때문에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고 했다. 때문에 조선후기 무관들과 기병들은 이 청룡언월도를 수련하길 즐겼다. 이런 대도류 병장기는 고려시대때부터 존재하였기에 아무런 문제없이 무기와 기예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특히 왜검의 검술이 신묘해도 청룡언월도의 휘두름 앞에선 무용지물이라는 기록이 있음을 볼때, 칼중의 왕이라는 말은 거짓이 아닌것이다.
이상, 청룡언월도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이 무기를 잘썼다고 전해지는 무인들을 알아보자.
<덕수궁 박물관 언월도, 철퇴>
효종(1619~1659)
조선 제17대 왕.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서의 8년간 볼모생활 중 그 설욕에 뜻을 두어, 즉위 후 은밀히 북벌계획을 수립, 군제의 개편, 군사훈련의 강화 등에 힘썼다. 그러던중 청나라의 강요로 러시아 정벌에 출정하였고 이에 자신감을 얻어 북벌을 실행하기 직전에 지병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했고, 상평통보(常平通寶)를 화폐로 유통시키는 등 경제시책에 업적을 남겼다. 효종은 북벌을 실시할때 살수와 기병, 조총수를 양성하였으며 자신도 청룡도와 철퇴를 만들어 시간날때마다 말을 달리며 무예를 익혔다. 청룡도는 굉장히 무거워 일반 무장들도 휘두르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융릉>
장조(1735~1762)
본관은 전주, 이름은 이선, 부인은 혜경궁 홍씨이다. 흔히 "사도세자"라 불린다. "장헌"이라 불렸다가 1899년에 "장조"로 추존되었다. 어려서 부터 고조부인 효종을 닮아 그가 쓰던 청룡도와 철퇴를 14,5세때 부터 다루었다. 기마술은 물론 활쏘기에도 뛰어났으며 병서를 즐겨읽었다. 그는 선조때 지어진 <무예제보>의 6가지 무예와 본국검, 왜검, 교전, 죽장창 등 12가지 무예를 합하여 <무예신보>를 편찬했다. 후에 그의 아들인 정조가 마상무예 6가지를 합하고 옛 병서들을 새롭게 해석하여 24가지 무예가 들어있는 <무예도보통지>를 만들었다.
<밀양 표충사 언월도>
사명당(1544~1610)
속세명 임응규. 법명은 유정. 13세때 출가하여 1561년 승과(僧科)에 급제하고, 1575년에 봉은사의 주지로 초빙되었으나 사양하고 휴정(서산대사)의 법을 이어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휴정의 휘하에 들어가 승군을 이끌었다. 이듬해 승군도총섭(僧軍都摠攝)이 되어 명나라 군사와 협력, 평양을 수복하고 권율과 의령에서 왜군을 격파, 전공을 세우고 당상관의 위계를 받았다. 1594년 명나라 총병 유정(劉綎)과 의논, 왜장 가토 기요미사의 진중을 3차례 방문, 화의 담판을 하면서 적정을 살폈다. 정유재란 때 명나라 장수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의 도산과 순천 예교에서 전공을 세우고 1602년에 중추부동지사가 되었다. 1604년엔 왜국에 사신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강화를 맺고 포로 3000여명을 되찾는 외교술을 보여준다.
<마상월도 - 무예도보통지>
백동수(1743~1816)
조선후기 무인. 호는 영숙. 무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말타기, 그리고 검술에 열망하였다. 그래서 당시 검술이 뛰어났던 검선(劍仙) 김광택을 찾아가 검술을 배우며 무인으로서의 기초를 다져갔다. 백동수는 1771년 식년무과에 당당히 합격했으나 관직 수가 턱없이 부족해 벼슬을 얻지 못했다. 그는 아무런 미련없이 강원도 산골로 들어가 10년간 생활한다.
그러던 중 영조가 서거하고 정조가 즉위하자, 정조는 국왕직속친위부대인 장용영을 개설함에 창검의 일인자로 백동수를 다시 천거하였다. 1788년 그는 장용영 초관의 벼슬을 받게되었다. 이듬해 가을, 백동수는 정조의 명으로 당시 규장각에 있던 이덕무, 박제가와 함께 군사무예서 편찬작업에 들어간다. 이 과정에서 백동수는 발로 뛰어 문헌기록을 하나하나 살피고, 무예에 뛰어난 장교 여종주, 김명숙과 함께 군영마다 약간씩 차이 나는 무예의 기법을 통일하였다. 그리하여 1790년, 각고의 노력끝에 보병무예 18가지와 마상무예 6가지를 합친 <무예도보통지>가 만들어 지게 된다. 이 책은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등의 중앙 군영은 물론 팔도의 군영에 보급되어 군사훈련의 교범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정조가 49세의 나이로 서거한지 2년도 채 되지 않은 1802년 정월, 개혁정치와 부국강병의 상징이었던 장용영은 정조의 개혁을 반대했던 노론벽파에 의해 해체되었고 개혁인사들, 특히 군사적 역량을 장악했던 무장들이 축출되었다. 이 과정에서 백동수 역시 벼슬자리에서 쫓겨나고 유배형을 선고받는다.
결국 장용영은 해체됬고 백동수는 1816년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초상화는 전해지지 않지만 무예도보통지 중 마상월도부분에 유일하게 수염을 기른 시연자가 등장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백동수였음을 추측할수 있다. 마상월도는 일반무사들이 하기엔 매우 어려운 무예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당대 최고의 무사인 백동수가 아니고선 시행할수 없었을 것이다.
<이삼장군 유물>
이삼(1677∼1735)
조선 후기 무신. 1705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정주목사를 거쳐 평안도병마절도사, 함경도병마절도사를 지내고 경종 때 소론으로서 포도대장이 되었다.
1725년 어영대장으로 경종 때의 죄인을 신문한 사건에 관련, 이정신과 함께 파직되어 경상도 곤양(사천)에 유배되었다. 1727년 왕의 특지로 훈련대장에 복관되어 이인좌의 난을 평정, 공신에 책록되고 함은군에 봉해졌다.
그뒤 소론 출신으로서 누차 이인좌의 일당이라는 무고를 받았으나 왕의 신임을 받아 무사했으며 벼슬이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기계 제조의 방법과 창검무예에 정통했다. 저서에 <관서절요>가 있다.
그가 사용하던 언월도는 길이 191.5㎝, 무게 2.9㎏으로 ‘용광사우두성(龍光射牛頭星)’ 이라는 명문이 새겨 있다. 철퇴는 길이 62㎝, 무게 1.3㎏으로 둥근 철구에 자루를 끼웠고, 철구에는 못과 같은 것이 박혀있다. 길이 134㎝, 폭 64㎝의 영정은 무관의 옷을 입은 상(像)과 문관의 옷을 입은 상이 있다. 검은 길이 70㎝, 무게 1.8㎏ 이다.
유정(?~1619)
명나라때 장군. 임진란이 일어나자 정병 5천을 이끌고 조선으로 출병한다. <명사> 유정전에 이르기를, 페르시아산 철로 120근의 칼을 만들어 말위에서 휘두르니 천하가 유대도(劉大刀)라 칭했다. 1619년 후금의 침입을 막다가 패하여 죽었다.
유격(?~?)
임진왜란때 출병한 명나라 장수. 1598년 동작동 모래사장에서 선조와 대신들 앞에서 명나라의 진법, 무예등을 선보였다. 언월도, 당파, 낭선등의 기예를 보여주어 조선군에 보급하도록 건의하였다. 유격은 우리나라 검술을 보고 "기법이 좋으나 죽음을 각오하고 나서야 쓸수있다."고 평하였다.
양귀(?~?)
명나라에서 파견온 장수. 황해도에 파견되어 조선군에게 무예를 가르쳤다. 특히 쌍도와 언월도를 잘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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