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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전사들>

조선의 조자룡, 정기룡

 

 

 

 자는 경운(). 호는 매헌(). 시호는 충의(). 곤양 정씨()의 시조이다.

1562년 경남 곤양에서 태어났다. 본래 이름은 무수()였다. 1580년 고성()에서 향시에 합격하고, 1586년 25세에 무과에 4등으로 급제하였다. 이때 그의 무예실력에 탄복한 선조가 친히 '기룡(起龍)'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이후 1590년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신립()의 휘하에 들어가 훈련원 봉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별장()으로 승진하여 우방어사 조경()을 따라 종군, 첫 전투인 거창()에서 기병 수십기를 거느리고 왜군 500여명을 격파하고 금산()싸움에서 포로가 된 조경을 필마단기로 구출한 뒤 1592년 9월에 곤양의 수성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정기룡은 "조자룡"이란 별명을 얻게된다.

 

  10월에는 초유사 학봉 김성일이 진주성에 있다가 장군을 불러 한후장으로 삼아 적의 후방을 교란하게 하여 진주성 전투 승리의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학봉 김성일이 경상감사가 되어 장군의 공을 조정에 알리니, 조정에서는 상주가판관의 벼슬을 내렸다. 당시 상주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자, 상주사람들은 왜적을 피해 험준한 골짜기인 용화동에 숨어 있었다. 그런데 장군이 상주로 부임하다가 적이 이곳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병력을 거느리고 질주하여 적 삼백명을 죽이고 백성들을 구하였다.

 이 일로 인해 상주 사람들은 정기룡이 아니었다면 자신들은 모두 죽은 목숨과 마찬가지라고까지 하였다. 이어 곧 장군은 상주성 탈환에 결정적 공을 세워 서애 유성룡의 천거로 1593년 정식으로 상주목사겸 감사군대장(敢死軍大將)이 되었다. 감사군대장은 ‘죽기를 무릅쓴 군대’의 대장이란 뜻이다. 정기룡이 백성들을 구하고 그 중에서 용감하고 건장한 사람을 뽑아서 병졸로 삼으니 모두가 장군의 은혜에 감복하여 적병을 만나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이겼기 때문에 사람들이 ‘감사군’이라고 하여 조정에서 특별히 정기룡을 감사군대장으로 임명한 것이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토왜군의 선봉으로 북상하는 일본군을 치기위해 30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경상도 성주로 이동했다.

8월, 정기룡은 척후장 이희춘과 황치원에게 기병 400여명을 주어 정찰케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의 정찰대를 맞아 격렬한 전투를 벌였고 수급 100여개를 얻는 전과를 올린다.

 전투가 벌어진 다음날, 정기룡의 조선군과 1만 2천여명의 일본군이 고령의 용담천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정기룡은 왜적에게 죽임을 당한 가족들과 만행을 이야기하며 아군의 사기를 북돋아주었다. 정기룡도 2차 진주성 전투때 자신의 아내를 잃어 일본군에 대한 적개심이 극도로 치달았다. 계속된 신경전 끝에 먼저 움직인 쪽은 조선군이었다. 갑자기 군사의 수가 줄어들더니 순간, 군사의 태반이 북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 기회를 놓칠리 없는 일본군 장군은 전군을 이끌고 조선군을 추격했다.

 

 일본군이 고령 이동현까지 추격하자, 퇴각하던 조선군이 갑자기 멈춰 전투대형을 갖추었다. 순간 3면에서 복병이 일어나 일본군을 고립시켰다. 조선군의 퇴각은 정기룡의 계략이었던 것이다.


 일본군이 조총으로 공격하려 하자, 조선군은 화약무기를 던져 조총을 무력화 시켰다. 그러자 편곤과 장창을 든 기병대가 순식간에 일본군 진형을 쇄도하였다. 왜군의 머리는 편곤에 의해 수박깨지듯 깨치고 장병겸과 장창에 의해 내장과 피를 쏟아냈다. 본래 단병접전에 능하지 못한 조선군이었지만 명군에 의해 보급된 새로운 무기인 편곤과 장창, 당파등으로 무장하여 전투력을 향상시켰다. 그러나 무기나 전략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한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나가 맞써 싸우는 불굴의 정신이었다. 조선군의 광폭한 모습에 일본군은 칼 한번 못 휘둘러보고 무너져 내렸다. 후방으로 퇴각하던 일본군은 미리 매복하고 있던 기마궁사들의 표적이 되었다.


 결국 조선군의 계속된 공격으로 일본군 1만 2천명은 전멸하였다. 조선군은 일본군을 토막내고, 목을 자르고, 배를 갈라 내장을 꺼냈다. 이 전투에서 수습된 일본군 시신은 큰 집 6채와 맞먹었고, 정기룡은 이들의 귀를 모두 잘라 전공에 보고하였다. 이 일로 일본군은 물론 명나라군과 장수들도 정기룡을 두려워 하였다.

 

 이후 정기룡은 합천, 의령, 울산 등 무수한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전투마다 승리를 하자 도체찰사 이원익이 “어느 곳에서 이 같은 명장을 다시 얻겠는가?”하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전공으로 절충장군 겸 경상우도병마절도사를 제수받았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도 김해부사, 밀양부사 등의 관직에 나아가 백성들을 보살피는데 온 힘을 다하였다.
 1605년 4월에는 그 동안의 전공으로 선무공신 1등에 기록되었으며, 9월에는 오위도총관, 12월에는 경상좌병사 등의 벼슬을 내렸다. 장군은 경상좌병사를 2번, 경상 우병사를 3번이나 맡았으며, 1617년에는 2월에는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수사의 직을 맡았다. 육군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를 맡았으니 그 용맹은 당대 제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622년 삼도수군통제사 본영인 통영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1세였다. 장군이 세상을 떠난 후 상주에서는 충렬사를(忠烈祠) 세워 은혜를 기리고 있고, 고향인 하동에서는 경충사를 세워 그 공을 추모하고 있다.

이후 1773년, 영조가 정기룡의 공을 높이 사 "충의공(毅公)"으로 격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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