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까지 전해지는 그 당시의 송강 설화로서는 [대송선화유사大宋宣和遺事]가 있다. 이 책은 송인宋人의 글이라고 전해지고 있지만, 그 내용에 원대의 말이 석여 있는 것으로 보아 원인元人이 썼거나, 그렇지 않으면 송인이 쓴 것을 원인이 손을 대었거나 그 중 하나로 헤아려진다. 상고上古에서 당唐에 이르기까지의 역대흥망을 약술하고 나서, 다음에는 송태조에서 철종에 이르는 칠대의 사실을 약기한 뒤, 휘종 때의 이야기로 들어간다. 조정에는 간신이 들끓어 황제는 현량賢良을 물리치고 향락에 잠기니 국정은 문란할대로 문란해졌다. 드디오 수도 변경까지 금군에 의하여 함락되고, 휘종과 흠종은 포로가 되어 북변으로 사라졌다.
그 일부로서 기록된 송강의 이야기는 오늘날의 수호지 이야기와 반드시 일치되지는 않으나 그 모체인 것은 틀림이 없다.
그 대강을 옮겨 본다.
(1) 선화宣和 2년 양지, 이진의(李進義=수호지의 노준의), 임충, 왕웅(王雄=양웅), 화영, 시진, 장청(張靑=張淸), 서령, 이응, 목횡穆橫, 관승, 손립 등 12인은 주면 화석강花石綱의 재령宰領에 임명되었다. 이 때 열 두사람은 형제의 의를 맺고 화를 당할 때는 서로 돕기로 서약했다. 이진의 이하 열 사람은 무사히 화석을 운반하여 서울로 돌아갔으나 양지는 영주潁州에서 손립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눈에 길이 막혀 부질없이 날을 보내다가 노자마저 떨어져서 거리에 칼을 팔러나갔다. 그 때 우연히 어떤 불량배와 다투게 되어 양지는 그 자를 죽여 버리고 위주衛州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위주로 귀양을 가는 길에 손립을 만났다. 손립은 불철주야하고 서울로 올라가서 이 일을 전했다. 이들 열 한 사람은 황하黃河가로 나가 양지를 기다려서 방송공인을 죽이고 양지를 구출하여 함께 태행산太行山으로 들어갔다.(이상 12인)
(2) 동년 5월, 북경 유수留守 양사보楊師寶는 채태사의 생일 축하로 10만관의 금은주옥과 값진 보물을 현위縣尉 마안국馬安國에 맡겨 서울로 보냈다. 일행이 오가영五家營이란 곳에 쉬고 있는데 한짝의 술통을 멘 여덟 명의 사나이가 와서 함께 쉬었다. 마안국 일행이 그 술을 사서 마셨더니 모두 눈이 캄캄해지고 머리가 어지러워 잠이 들고 말았다. 여덟명의 사내는 금은주옥과 보물을 몽땅 털어서 달아났다. 술통을 근거로 조사를 한 결과 그들은 조개, 오가량(오용), 진명, 유당, 원진(院進=院小二), 원통(院通=완소오), 원소칠, 연청 등임을 알았다. 곧 포리捕吏를 뒤쫓게 했으나 押司官員인 송강의 내통에 의하여 태행산으로 들어가 먼젓번의 열 두사람과 어울리어 양산박(태행산)의 일당이 되었다.(이상으로 20명)
(3) 어느날 조개는 송강에 대한 구명지은救命之恩을 갚기 위하여 유당을 시켜 한쌍의 금채(金釵=금비녀)를 그에게 보냈는데, 송강은 이것을 단골 창녀인 염파석閻婆惜에게 맡겼기 때문에, 그가 도둑들과 통했다는 것을 염파석이 알게 되었다. 그 뒤 송강은 부친의 병환으로 귀가하는 길에 고기잡이 두천(杜千=杜遷)과 장령(張령=장횡)이 삭초라는 거구의 사내와 함께, 주막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을 만났다. 여기에다 포리 동평까지 끼어서 네 사람이 모두 양산박을 동경함고 있음을 알고 조개에게 편지를 써서 그들을 양산박으로 들여 보냈다.(이상 24명)
부친의 병이 완쾌하여 송강이 포청으로 돌아가는 도중 정부 염파석에게 들렀더니 염파석이 다른 남자와 동침하고 있으므로 이들을 죽이고 집에 가 숨었다. 포리가 닥쳤으므로 집뒤의 구천현녀모九天玄女廟에 숨었다. 포리들은 그를 찾지 못하고 대신 부친을 잡아갔다. 송강이 구천현녀에게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향탁 위에 두루마기가 떨어졌다. 펴 보니 36인의 성명이 기록되어 있고 송강이 그 수령임이 시부詩賦로 적혀 있었다. 거기서 송강은 주동, 뇌횡, 이규, 대중, 이해(李海=이준), 사진, 공손승, 장순, 무송, 석수 등 10명을 거느리고 양산박으로 들어갔다. 양산박에 가 보니 그때는 이미 조개가 죽고 오가량과 이진의가 수령으로 되어 있었다. 송강이 구천현녀묘에서 얻은 기록을 말했더니 그들은 곧 송강을 수령으로 추대했다. (이 때 이미 조개가 죽고 없었으므로 양산박의 적도는 송강 이외에 33인 이었다.) 양산박의 도둑들은 경셔京西, 하북河北, 회양淮陽등 3지구地區 24주州 80여 현縣에 걸쳐, 여자와 금백金帛을 무수히 털었다. 조정에서는 호연작을 대장으로 삼고 해적질하다 투항한 두령에게 명령하여 송강등을 잡게 하였으나 번번이 싸워서 패했을 뿐이므로 조정의 책망을 감당치 못한 채 도리어 양산박의 적도에 가담하고 말았다. 이 무렵 불승 노지심이 또한 도당이 되었다.(이상 송강 외에 36인)
(4) 조정에서는 송강 외 36인을 어찌할 수 없어 원수元帥 장숙야를 산채로 보내어 그들을 귀순시켰다. 조정에서는 그들에게 무공대부武功大夫의 관직을 제수하고 순검사巡檢使로 각지에 파견했다. 나중 송강은 방랍을 토벌한 공으로 절도사節度使에 봉해졌다.
이상이 <대송선화유사>에 기록된 송강설화의 전모다. 앞에 말한 <송강삼십육인찬>의 36인 속에는 송강이 포함되어 있고 오늘날의 수호지에도 송강을 포함한 36인으로 되어 있으나 이 <대송선화유사>의 36인엔 송강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성명에도 이동異同이 있다. 그러나 이야기의 골자는 거의 같다.
'<수호지> > -수호지의 세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호사설』에 실린 수호지 (0) | 2014.03.10 |
---|---|
수호지의 시대적 배경 (0) | 2014.03.03 |
역대 수호지 판본들 (0) | 2014.02.06 |
수호지와 관련된 무협담 (0) | 2014.02.06 |
수호지란? (0) | 2014.0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