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水湖志의 배경 >
☆ 시대적 배경
당이 망한 후, 50년 兵火와 戰亂의 5대 10국의 시대가 열린다.
후주의 절도사인 조광윤(후에 宋 태조 무덕황제)은 부하 장수들의 강력한 추대로 시(柴) 세종에게서 제위를 물려 받는다.
나라 이름을 大宋으로 하고 변량(개봉부) 도읍을 정함으로써 송조 400년의 기틀을 마련한다. 태조는 17년 동안 나라를 다스린 후 아우인 태종에게 제위를 넘긴다. 태종은 22년만에 진종에게, 진종은 인종에게 제위를 전한다.
인종은, 우리에게 포청천으로 잘 알려진 개봉부 용도각 대학사 포증과 서하국을 정벌한 대원수 적청 두 신하가 좌우에서 보좌하니 42년간이나 태평성대를 누렸다.
인종이 죽은 후 영종이 황제가 되고, 4년 후 신종에게 그 자리가 넘어간다. 18년간 나라를 다스린 신종은 철종에게 제위를 전한다. 철종이 죽자 철종의 아우인 단왕이 황제가 되니 그가 바로 휘종이다. 이 휘종이 제위에 있던 시대가 바로 수호지의 배경이 된다.
☆ 작품과 인물 배경
수호전은 알려진대로 중국 4대기서의 하나로 원나라 말기에서 명나라 초기에 완성되었다.
시내암이 작자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송강을 비롯한 108명의 인물들이 사회의 억압을 견디지 못하고 양산박에서 탐관오리들을 상대로 도적질하는 것이 주 내용이다.
이는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진 것으로 1117년경 송강이 36인을 이끌고 산동의 양산박에서 봉기를 일으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세력이 대단하였으나 1121년경 결국엔 투항하였다고 한다.
수호지는 현재 120회본이 가장 완비된 것으로 알려져있으며 김성탄이 다시 쓴 70회본 역시 많이 나와있는데 이것은 송강의 무리를 도적으로 몰아 버리고 반정권적인 어휘를 모두 삭제해 버린 것도 모자라 108명이 모인 부분에서 다 죽여 버리고 끝을 내서 원작을 많이 훼손한 작품으로 알려져있다(사실 원작도 70회 이후부터는 그 구성이나 필력이 떨어진다).
소설에서는 (70회본 제외)후에 사면을 받고 방랍의 반란군을 막은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정사에는 나오지 않지만 다른 기록들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조정의 권위를 생각해서 정사에 기록되지 못한 사실로 보인다. 송강의 무리는 방랍토벌 후 회군해서 들어오는 것을 한달 안에 모두 체포하여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1121년 6, 7월경).
이 소설에는 당시 시대상황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송강이 날마다 바라는 사면과 탐관오리를 미워하면서도 황제를 우러러는 마음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108명 인물의 개성과 각 인물의 독립적인 스토리가 전체적으로는 완전한 하나의 구성을 이루고 있는 점 디테일한 묘사와 사용언어 등이 수호지를 명작으로 남게 하는 강점이다.
수호지의 영웅들은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도적이다. 충의의 상징인 것처럼 계속 강조하지만 가끔 목적을 위해서 아무 상관없는 양민들을 무참히 살해하기도 한다.
송강은 주인공이지만 인물도 볼품 없고 인정많고 의리를 중히 여길 뿐 나약하고 고지식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다. 이는 유비나 삼장법사와 같은 설정이기도 하다.
☆ 설화적 배경
인종 때 전전(殿前)태위인 홍신은 황제의 명을 받고, 당시 유행하던 염병을 퇴치하기 위해 강서 신주 용호산의 사한천사를 청해 하늘에 기도를 올리게 했다.
어명을 전한 홍신은 산의 도관을 돌아보던 중, '복마지전(伏魔之殿)'이란 전각에 들어가게 된다. 그 안엔 돌비석 하나가 있는데, 거기엔 돌비석 아래에 악귀가 봉해져 있다고 쓰여 있었다.
주위사람들의 만류에도 홍신은 그 돌비석을 치우게 했다. 돌비석을 치우니 그 안에 갇혀있던 108요괴가 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그 108요괴가 사람으로 환생하니, 수호지의 108 호걸들이라...
양산박은 108호걸들이 모여 살았던 장소이고, 수호지의 주 배경이다.
산둥성 서남부에 자리잡고 있는 량산은 서쪽으로 파도가 출렁이는 황하와 면하고 있고 동쪽으로 칭항대운하,북쪽으로 800리 수박 유적지인 둥핑호에 인접돼 있다.
이곳은 북송 말기, 송강이 천하의 영웅호걸들과 의형제를 맺고 호수(수박)의 험준한 지리적 조건을 이용해 탐관오리를 숙청하고 가난한 백성들을 도와 세상에 이름을 떨친 유적지자 문명의 발상지다. 800여 년 전만 해도 이 일대는 사방 8백리에 달하는 거대한 호수였다.
『수호지(水滸誌)』의 시대
『수호지(水滸誌)』의 시대는 송(宋)의 휘종(徽宗) 연간이다. 정확히 말하면 북 송(北宋) 말에서 남송(南宋) 초에 걸치는 시기라 볼 수 있다. 사실 상 휘종 황제는 북송 최후의 황제였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시대는 매우 혼란하여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결국에는 북송이 멸망하는 계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휘종 시대에는 신법 덕분에 재정이 풍요로워져 정부에 상당한 잉여금이 있었다. 휘종은 이 자금을 이용하여 마음껏 유흥에 탐닉했다. 휘종에게 도락을 전하는 한편 또 그 좋은 상대자였던 자는 재상 채경(蔡京)이었다. 휘종은 시문에 뛰어났으며 붓글씨와 그림 또한 당대 일류라는 풍류천자(風流天子)였다.
휘종은 전국으로부터 명인들의 서화와 골동품들을 수집하고 궁정의 화원(畵院)에 저명한 화가를 집결시키는 등 예술을 장려하였다. 휘종은 또한 궁전과 도관(道觀), 정원 등을 조영하여 밤낮으로 유흥에 몰두하며 돈을 물 쓰듯 했다. 채경은 그 비용을 감당하기 위하여 인민에게 중세를 부과하고 전매법을 강화했다. 왕안석의 신법은 원래 민생의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었지만 이 무렵이 되면 신법이 인민의 수탈의 도구로 변질되었다.
특히 인민을 괴롭혀 원성을 산 것은 화석강(花石綱)이었다. 화석강은 화초와 기이한 석재 및 수석들을 운반하는 선단이란 의미로 채경은 진귀한 꽃과 나무들을 좋아했던 휘종의 뜻에 영합하여 강남(江南)지방으로부터 진귀한 나무와 수석들을 헌상시키도록 했다. 휘종이 바란 것은 황하권(黃河圈)에 있는 개봉에 강남의 경관을 만들겠다는 그야말로 예술가다운 생각이었다. 그의 목표물은 명목(名木), 명화(名花), 기암(奇岩), 진석(珍石) 등 북방에는 없는 것이었다. 특히 태호(太湖)의 물 속에서 따내는 이른바 태호석(太湖石)에 아주 반해 있었다. 호수 속에서 기암·진석을 끌어내는 일은 많은 사람의 힘을 빌려야만 했다.
그러나 말이 빌린다는 거지, 사람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일을 진행시켰다. 또한 이 선단들이 운하를 차지했기 때문에 수도에 이르는 물자수송이 불가능해져서 물자가 정체되었으므로 경제계는 커다란 타격을 받았으며 수도에 있는 군대의 봉급도 체불되었다. 그리고 천자가 사용한다는 명목아래 강제로 민가의 목석(木石)을 징발하였으며, 게다가 운반비용은 인민의 부담이었으므로 강남 민중들은 몹시 고통을 받았다. 따라서 가난한 백성들은 자식을 팔아 그 비용에 충당했을 정도였다.
휘종은 여전히 예술생활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이 무렵 도교에 빠지게 되었다. 휘종은 스스로 '교주도군황제(敎主道君皇帝)'라 이름하고 천하에 도교의 선경(仙經)을 구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그리하여 임영소(林靈素) 등에게 도교를 강론케 하고, 천도회(千道會)라는 대재(大齋 : 도교의 의식)를 설치했는데 그 때마다 비용은 수만 금이 필요했다고 한다.
또 휘종은 미행(微行)으로 거리를 돌아다니기를 좋아하여 개봉의 유흥가에도 출입하였다고 하는데 개봉의 명기 이사사(李師師)가 그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휘종시대를 통해 문화는 난숙한 경지에 달하여 일견 화려해 보였다. 하지만 그 내실은 유흥에 탐닉하여 정치에 어두운 황제와 이를 기화로 하여 전권을 휘두르는 간신들에 의해 정치는 부패해져 있었다. 그리하여 휘종의 치세 20년 사이에 송조는 이윽고 손을 댈 수조차 없는 중병에 빠져들었다. 또 이러한 시기에 곳곳에서는 반란이 발생하게 되었다. 『수호지』는 바로 이러한 혼란한 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지고 있다.
출전 중국사연구실 편역,『중국역사(하권)』, 신서원,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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