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수반두(Vasubandhu, 世親, 316~396)는 불교 사상가로 간다라 지방 푸루샤푸라성의 브라만 가문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맏형은 사상가로 유명한 아상가(Asaṅga, 무착)이다. 카슈미르와 간다라의 여러 부파불교(部派佛敎)의 학설을 배우고 요강서인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를 지었다.
후에 아상가의 감화로 대승불교(大乘佛敎)로 전향한 후 마이트레야(Maitreya, 미륵) 밑에서 수학하였다. 모든것은 의식에 불과하다는 유식(唯識)사상을 설파하면서 유가유식설(瑜加唯識說) 완성에 힘썼고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과 『유식이십론』,『대승백법명문론』을 지었다.
바수반두 『유식삼십송』명언
1 . 아트만(我)과 다르마(法)라는 용어들의 형상은 다양하게 전해진다. 그것들은 모두 의식에 의해 변하는 것이다. 의식의 변형은 세 층위(숙성하는 의식, 사유하는 의식, 구별하는 의식)로 일어난다.
첫번째(숙성하는 의식)는 알라야식(ālaya識)이라고 불린다. 그것은 모든 과거 경험들의 종자를 가지고 있다. 알라야식은 자신 안에 알수 없는 대상(執受)과 장소(處)에 대한 의식 표상을 가지고 있다. 항상 접촉, 주의, 인식, 생각, 의지와 관련되어 있다.
알라야식의 감수작용은 무관심한 것이다. 이 의식은 순수하며 도덕적으로도 중립적이다. 이와 유사하게 접촉 등에도 무관심하다. 알라야식은 급류의 흐름과 같다.
알라야식은 아라한(arhattva)의 경지에 이르면 소멸된다.
2. 마나스(manas)라는 의식은 알라야식에 의지하고 알라야식을 대상으로 갖는다. 마나스는 본질적으로 사유하는 행위이다. 네 가지 번뇌를 항상 갖추고 있는데 그것은 자아에 대한 믿음(我痴), 자아에 대한 무지(我見), 자아에 대한 오만(我慢), 자아에 대한 사랑(我愛)이다.
마나스는 또한 우리가 태어나서 살고 있는 세계와 동알한 본성을 갖고 있는, 접촉 등과 같은 다른 것들과 관련되어 있다. 마나스는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 사람에게는 귀속되지 않는다.
그것은 고요한 의식 상태나 세속을 떠난 길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이것이 의식의 두 번째 변형이다.
3. 세 번째 의식의 변형은 여섯 층위의 대상에 대한 지각과 동일한 것이다. 구별하는 의식은 성격상 선하거나 나쁘거나 아니면 중립적이다.
4. 세 층위로 이루어지는 의식의 변형은 단지 주체와 대상에 대한 분별일 뿐이다. 이렇게 분별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것은 의식의 표상일 뿐이다.
의식은 모든 종자를 포함한다. 의식의 이러저런 변형들은 종자들의 상호 영향으로 진행되며, 그 때문에 이러저러한 분별들이 생긴다.
5. 상상하는 것에 의해 상상된 모든 것은 '상상된 본성(遍計所執性)'을 가지며, 그것의 본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것에 의존하는 본성(依他起性)'은 조건되는 것들로 부터 생겨난다.
'절대적으로 달성된 본성(圓成實性)'은 '상상된 본성'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어 있는 '다른 것에 의존하는 본성'이다.
때문에 '절대적으로 달성된 본성'은 '다른 것에 의존하는 본성'과는 다른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것도 아니다.
이것은 무상함과 같다. '절대적으로 달성된 본성'이 지각되지 않으면, '다른 것에 의존하는 본성'도 지각되지 않는다.
6. 모든 것들을 자신의 궁극적 실재성을 갖도록 하는것, 이것은 또한 진여(眞如, tathātā)라고 불린다.
이것은 항상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의식의 표상일 뿐임을 깨닫는 상태이다.
7. 자신 앞에 무언가를 둔다면, 모든 것이 의식의 표상일 뿐이라는 지각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의식의 표상일 뿐이라는 꺠달음에 머물지 못할 것이다.
8. 그렇지만 의식이 더이상 대상을 자각하지 않을 때, 그 경우 의식은 단지 의식의 표상일 뿐이라는 깨달음에 머물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파악되어지는 대상이 없다면, 그것을 파악하는 주체도 있을 수 없기 떄문이다.
9. 아는 마음도, 알려지는 대상도 없을 때 이런 상태가 속세를 벗어난 지혜의 상태이다. 이런 상태는 두 층위에 일어나는 악을 제거함으로써 발생하는 '바탕의 변화(轉依)'를 뒤따르는 것이다.
10. ('바탕의 변화'를 뒤따르면)이것이 곧 번뇌가 없고, 이해될 수 없고, 선하고, 변함없고, 안락하고, 해방된 몸상태로 또한 위대한 성인의 진리의 몸이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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