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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전사들>

마상무예의 역사

 


출처 - 월도마왕의 역사블로그(http://ichigeki1028.blog.me/)

 

마상무예에 관련된 글 일부를 발췌하였습니다.

 

자료 게재를 허락해 주신 월도마왕님께 감사드립니다.

 

 

 

 

 

 

마상무예의 역사

 

 

 

 마상무예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무예는 바로 기사(騎射)이다.

 기사는 마상궁술이라고도 하며 말위에서 활을 쏘는 고난이도 무예를 말한다. 서양에서는 Horseback Archery라고 말하며 기원전부터 전세계적으로 기마 유목민들에 의해 발달되었다. 오늘날 각 나라마다 전해지는 기사 방법은 모두 다르나 모두 기마 유목민과 크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 기사의 정확한 기원은 알수 없지만 고구려의 무용총과 덕흥리 고분, 백제의 금동 대항로에 기사가 표현된것을 볼때 삼국시대 이전부터 전해진것으로 추측된다. 기사는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무예이며 고려, 조선대에 들어서도 기병들의 중요 무예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기창(騎槍)은 말을 타고 사용하는 창 또는 창술을 말한다.

 창은 전세계를 통틀어 기병이 사용하던 무구 중에서 가장 오래된 축에 속하며 그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서양에서는 'Jousting'이라는 마상창 시합을 통해 기병용 창인 랜스(Lance)가 발달하였다. 랜스의 길이는 4m를 넘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폴란드 윙드 훗사르들이 사용한 코피아(Kopia) 랜스는 무려 6m를 넘겼다고 한다. 서양의 랜스들은 챠징(charging)에 특화된 무기이기 때문에 길이와 타격에서 매우 강력했지만 다양한 동작을 수행할수 없다는 면에서 무예적인 체계화가 아닌 개인 군사 기술의 한 부분으로써만 자리잡았다.

 

 동양의 마상창은 서양 랜스와는 모양새나 길이가 다르지만 서양 기사들의 챠징은 물론 다양한 동작을 할수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무예적 체계화가 가능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동양의 대표적인 마상창은 삭(削), 모(矛), 극(戟)이 있으며 가장 긴것은 삭으로 1장 8척(약 4m정도)의 길이를 가지고 있다. 고구려의 삭은 총 길이가 5m를 넘었고 무게는 6~9kg정도라고 한다. 마상창은 돌진하는 기병의 힘을 적군에게 전달하는 것이 주목적이기 때문에 충격이 끝난 이후에는 창이 부러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때문에 기병들은 창 이외에도 칼, 철퇴같은 보조무기를 항상 지니고 다녔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마상창 무예는 우리나라 무예도보통지의 기창(騎槍)이 대표적이다. 기창의 기술은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들로 구성되어 있어 그 기원이 정확하지 않으나 기창이 무예로써 체계화되기 시작한것은 조선초기때 부터이다. 1411년 태종때 병조가 '마창(馬槍)의 법'이라 하여 기병 훈련의 일환으로 마상창 기술을 실시할것을 아뢰었다. 이는 전해져 내려오던 마상창술의 무예화를 알리는 신호탄과 같았다. 이후 세종때인 1431년, 갑사의 훈련을 위해 보창세(步槍勢)와 기창세(騎槍勢)를 익히게 한것으로써 기창의 전신이 완성되었다. 이러한 기창세의 기법은 이후 무예도보통지에 하나의 무예적 형태를 이루며 수록되었다.

 기창은 조선초부터 기병들의 무과시험에 주요과목이었다. 두명의 시험자가 서로 교전을 하는 방법이 있었고 기추(騎芻)라 하여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를 찔러 평가하는 시험도 있었다.

 


 

 월도(月刀)는 송나라때 등장한 대도(大刀)류 병장기이다.

칼날에 비해 자루가 긴것이 특징이지만 창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주가 되는 칼날의 등위에 곁가지가 난 대도를 말하며 흔히 청룡언월도, 춘추대도라고도 불린다. 월도의 쓰임새는 매우 다양하여 기병은 물론 보병, 수병도 더불어 사용하였다. 월도의 기법은 삼국지의 관우가 36도법(刀法)을 전한다고 하였으나, 이는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된다. 관우가 살던 후한시대에는 대도류 병장기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것은 후대 사람들이 관우의 용맹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대도의 기법을 만든후 그것을 관우가 만든것이라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우연히도, 삼국지가 크게 인기를 끌게 된 시대는 바로 송나라 이후부터이다. 우리나라에 월도가 전해진 때는 임진왜란 전후 명군에 의해 전래된 것으로 추측된다.

 

 명나라의 모원의(茅元儀)가 말하길, 월도는 기예의 웅장함을 익히기 위함일뿐 실전에서는 사용할수 없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중국 월도의 특징에서 찾아볼수 있다. 중국의 월도는 조선의 월도에 비해 장식이 화려하고 매우 무겁다. 반면 조선의 월도는 낙옆처럼 얇고 화려하지 않지만 날이 살아있고 위협적이라고 하였다. 때문에 왜검을 이기는데 월도를 사용할 것을 권장하였다. 

 

 마상월도(馬上月刀)의 제도(製度)는 명확치 않지만 일반적인 월도보다 그 길이가 매우 긴것이 특징이다. <삼재도회(三才圖會)>란 책에 이르길, 마상월도는 앞으론 말머리, 뒤로는 말꼬리를 넘어야 한다고 하였다. 중국처럼 너무 무겁게 할필요는 없으나 일반사람들이 감히 들지 못할정도로 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마상월도의 기법이 무예화 되어 공식적으로 기록된 때는 정조때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한 이후부터 이다.

 


 

 말위에서 쓰는 쌍검인 마상쌍검(馬上雙劍)은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다.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급사 진안(陳案)이 말위에서 7척의 두자루 칼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영귀지(靈鬼志)>란 책에 전해짐을 볼때, 마상쌍검의 기원은 고대 중국에서 시작되었음을 알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임진왜란때 명군에 의해 쌍검법이 전래되었는데 당시의 법은 전해지지 않는다. 오늘날 전해지는 마상쌍검은 정조때 체계화 된것이다.

 

 쌍검의 특징은 공격과 방어가 동시에 이루어 진다는 것에 있다. 무예도보통지에 전해지는 중국 무술의 특징 처럼 전진하면서 기법을 펴고 다시 제자리로 후퇴하는 것을 기본 틀로 삼고 있다. 반면, 마상쌍검은 말위에서 하기 때문에 좌우방신(防身)을 그 목표로 삼는다. 매우 고난이도의 무예이기 때문에 모원의는 항상 사용할수 있는 기법은 아니라고 하였다. 

 


 

 

마상편곤(馬上鞭棍)은 B.C 2세기때 서융(지금의 티베트)의 기병대가 사용한 철편(鐵鞭)에서 유래되었다. 

서양의 프레일(Flail)과 그 형태와 사용법이 비슷하여 당시 한나라 보병을 상대하는대 위력적이었다. 이를 받아들인 중국에서는 이후 철연가(鐵連可), 철련협봉(鐵連夾棒)등으로 불리웠으며 이를 보병과 기병에 보급하였다.

 우리나라에 편곤이 전해진 때는 임진왜란때 부터이다. 당시 명군에 소속된 타타르 기병대가 편곤으로 왜군 수십을 무찔렀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후 전쟁의 피해를 덜 입은 전라도 지방에서 편곤을 제작하도록 하였다. 이후 편곤은 조선기병의 주력무기로 사용되었으며 편추(鞭芻)라는 무과시험을 통해 시험자들로 하여금 그 사용능력을 평가하였다.

 

 편곤의 기예와 무기는 보편곤(步鞭棍)과 마상편곤(馬上鞭棍)으로 나뉘어 진다.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편곤이란 단어는 바로 보편곤을 말한다. 그러나 본디 편곤이란 무기는 오래전부터 마상에서 사용되었고, 당시 편곤의 수량에서도 마상편곤이 보편곤을 압도적으로 눌렀다.

 


 

 

 마상재(馬上才)는 말위에서 하는 재주란 말로 기병들이 익히던 군사기예였다.

 마상재의 기원에 대해선 오늘날에도 의견이 분분하다. 중국에서 일찍히 전해진 기마술의 한 형태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오래전부터 전해진 우리 기마술이 고려, 조선때 체계화 된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마상재는 우리 기마문화의 훌륭한 유산이자 군사기예라고 할수 있다.

 

 마상재가 주로 전승되어진 곳은 군사들이 훈련하던 군영이었다. 인조때, 일본에서 통신사를 청하면서 이 마상재를 익힌 군사들을 보내달라고 하였다. 이에 인조는 통신사와 함께 마상재를 할줄 아는 자를 보내었는데, 당시 마상재를 본 일본인들은 그 기예의 출중함과 기법에 탄복하였다. 이는 <학산록>이란 책에 "절박한 싸움터에서 일대 장관을 이루는 무예"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말위에서 하는 모든 기예가 그러하듯, 마상재도 매우 위험하고 난이도가 높은 기예이다. 이를 익힌 기병은 기사는 물론 다른 마상무예들을 빠르게 익힐수 있었다. 기사가 주요 과목이었던 조선 기병에게 있어서는 꼭 익혀야하는 필수불가결의 기예였던 것이다. 때문에 정조는 마상무예 향상과 기병 양성을 위하여 무예도보통지의 24가지 무예 중 마상재를 포함하였다.

   


 

 

 격구는 고대 페르시아에서 유행한 기마스포츠에서 부터 시작되었으며,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때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규칙은 서양의 폴로(Polo)와 유사하며 편곤처럼 본래는 마상에서 시작되었다. 고려때엔 무관의 자제들 중에서 격구를 익히게 하였고 그 임금이 그 시합을 관람하였다. 의종때엔 국가적 유흥거리로 발전하였다가, 조선 세종때 들어서 군사훈련의 일환으로 격구를 적극 권장하였다. 조선 중기때까지 무과 시험의 하나로 명맥이 이어졌으며 정조때 24가지 무예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