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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전사들>

조선의 진정한 검객- 김체건과 김광택

 


출처 : http://ichigeki1028.blog.me/40067670044

 

 

 

 

 

 

<무예제보번역속집>의 왜검 

 

 

 김체건(?~?)은 숙종때 사람으로 무예가 뛰어나고 느슨함을 싫어하는 인물이었다.

훈련도감에서 살수로 재직하던 중, 일본검술을 입수하라는 명이 떨어져 자원하게 되었다. 칼쓰는 법은 일본검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본격적으로 부산에 있는 왜관에 들어가 일본인들의 노비로 일하게 되었다. 체건은 최대한 친하게 지내면서 열심히 일했지만 일본인들은 그에게 검술만큼은 보여주지 않았다.

 

 당시 왜관에는 일본인들만 아는 신묘한 검술이 있었는데 이는 말그대로 비급이었다. 지금이야 모든 무술들이 자신들의 기술을 쉽게 보여주지만 그시대엔 자기 유파의 기술을 타인에게 함부로 보여주지 않았던 시절이라 검술구경은 하늘에 별따기 만큼 힘들었다. 할수없이 체건은 일본인들 몰래 구덩이를 파 숨어서 그 기술을 엿보고 따라하였다. 정식으로 배우는게 아닌 숨어서 엿보는지라 익히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수년이 지나고, 일본검술을 다 익힌 체건은 곧바로 왜관을 떠나 훈련도감으로 복귀하였다.

일본검술을 입수했다는 말을 들은 숙종은 직접 행차하여 체건의 검술을 시험하였는데, 가히 환상인 듯 하여 사람들을 놀래켰다. 재 위를 걷는데 두 엄지발가락으로 움직였으며 발자국이 남지 않았고, 춤을 추는듯 가벼우면서 칼에 몸을 숨겨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숙종은 그를 훈련원의 교사로 임명하여 군졸들에게 검술을 가르치게 했다. 숙종이후 전해지는 일본검술은 모두 체건이 전한것이다.

 

 그의 아들인 김광택(?~?)은 어려서 부터 체건의 검술을 배워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단학을 수련해 "김신선"이라 불리우던 김홍기를 따랐으며, 스스로 자(字)를 "무가자(無可者)"로 지었다. 또 그에게 각종 경신과 술법을 배웠다. 광택은 몸이 가벼워 서울에서 금강산까지 두번을 왕복해도 짚신이 태닳지 않았다. 능히 태식(胎息)을 하며 추운겨울에도 옷 한겹으로 지냈다. 사람들은 그를 "검선(劍仙)"이라 하였다.

 그와 그의 아버지 체건의 일대기는 유본학이 지은 <김광택전>에 전해진다.

 

 체건이 전한 일본검술(왜검)은 모두 네가지로 토유류, 류피류, 운광류, 천유류이다. 또한 그는 일본검술을 토대로 약속대련 형태의 기예를 만들었는데 이를 "교전(交戰)"이라 한다. 왜검과 교전은 사도세자가 지은 <무예신보>의 18기(技)에 속해있다. 그의 아들 광택도 당대 검술의 일인자로 이름을 날렸다. <무예도보통지>의 실기해석을 맞은 백동수가 바로 그의 제자이다. 10대였던 백동수는 노인이 된 광택을 만나 검술을 전수받아 무인의 초석을 닦았다. 훗날 백동수에 의해 <무예도보통지>의 검술이 체계화되면서 그 흐름이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무예도보통지>야 말로 체건과 광택, 두 부자의 검술혼이 살아있는 무예서인것이다.

 

 검으로 충절을 지키고 조용히 사라진 김체건, 광택 부자. 이처럼 나라를 위해 온몸바쳐 검술을 연마한 선조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땅의 무혼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음을 확인할수 있다. 두 부자의 노력을 헛되이 하지 않기위해 올바른 역사의식과 전통복원에 힘써야 할것이다. 다시 나지 않을 위대한 검객들을 위해 오늘도 글을 마친다.